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란시스코 프랑코 (문단 편집) === 장군들의 반란 === >'''"정치로만 먹고사는 협잡꾼들이야말로 내가 하는 행동을 가장 두려워할 것이다."''' 공화정 수립 4년 만인 1936년에 다시 정부가 붕괴되고 이른바 인민 전선이라고 불리는 자유주의-좌파 연합세력이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자 우파 세력의 불안감은 극에 달한다. 이미 스페인 좌우파의 대립은 유혈사태로 이어진 전례가 있었다. 게다가 공화국은 우파 세력의 주요 구성원이면서 왕정 시대 거의 절대적인 특권을 보장받던 [[가톨릭]] 교회를 적극 견제했다. 원래는 가톨릭 교회 전체를 공격하려고 했으나 그것은 너무 부담스럽다 하여 [[예수회]]가 주 타겟이 되었다. 앤터니 비버의 [[스페인 내전]]에 따르면 가령 토지나 재산 등의 몰수, 특권 박탈 등의 주 타겟이 예수회였다. 이 때 몰수당한 재산이나 특권 등은 프랑코 시대에 정부에서 돌려준다. 그러나 정작 반동적 극우 사상이 팽배했던 당대 스페인 가톨릭 교회 내부에서 그나마 가장 자유주의적이고, 민중에 친화적인 성향을 보였던 파벌이 예수회였다. 당시 스페인 좌파 지식인들 상당수 본인들 또한 역사적으로 [[종특]]수준으로 교육을 강조했던 예수회 교육 과정이나 기관 출신이었고, 당시 스페인 진보 교육계를 지배한 조류였던 아나키스트 프란세스크 페레르 이 가르디아의 에스쿠엘라 모데르나(근대 학교) 운동 또한 예수회의 영심수련에 큰 영향을 받은 운동이었다. 스페인 가톨릭 교회 내에서 예수회의 존재감이 너무 강하다 보니 반대편에서도 단순히 우파의 주요 구성원인 가톨릭 교회의 상징적인 샌드백으로 고른 것인데, 이런 사정 때문에 종교세력의 반발도 위험수위에 달해 있었다. 인민 전선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위험 세력들을 제재하기 위해 군의 유력한 장군들을 외부로 떨어뜨려놓는 조치를 취한다. 이에 따라 프랑코도 참모총장직에서 해임되어 [[카나리아 제도]]로 추방되었으나, 오히려 이 때문에 프랑코는 자신의 세력기반이던 아프리카 파견군과 더욱 긴밀히 접촉할 수 있었고 이 시점에서 정부에 대한 그의 의견도 확고해진다. 하지만 프랑코는 이 시점에서도 태도를 명확히 하지 않은 채 상황을 주시하는 길을 택했다. 심지어 정부에 밀서를 써서 군부 내의 불만을 지금 당장 잠재워야 한다면서 필요하다면 자기도 돕겠다는 식으로 쿠데타가 곧 일어날 거라는 암시를 주고 있었다. 이 때문에 동료 장군들로부터 불신을 받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훗날 권력을 간단히 장악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같은 해 7월에 우파의 거물 정치이자 왕당파의 거두였던 칼보 소텔로가 좌파 정부에 부역하던 경찰에 의해 살해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결국 7월 말, 국민 진영(Bando Nacional)이라는 이름으로 장군들과 우파 세력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스페인 내전]]의 막이 오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